2009년 10월 29일 목요일

D-17



내가 베이시스트로 참여하는 마지막 공연이 이번주 금요일 청담동 Texas Moon에서 있을 예정이어서, 마라톤 및 시험으로 잠시 외유했던 밴드 맴버들과 함께 오랫만에 합주하는 시간을 가졌다.

앤드류와 신화가 나에게 베이스를 안겨주며 밴드 비슷한 걸 만들어보자고 했던 저녁이 벌써 일년 전이다. 도레미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회사 연말 파티에서 연주했고, 운좋게도 김창완 밴드 파티에도 한곡 연주했었다. 그후 나는 앤드류의 목없는 Steinberger Spirit을 넘겨받았고 신화는 자작곡을 만들어냈으며, 현재씨가 중후한 리드 기타로 우리와 얼마간 함께 하다가 Wonderful Tonight으로 멋진 프로포즈를 날린 후 떠나기도 했다. 마음씨 좋고 기타도 엄청나신 사장님이 반겨주는 Texas Moon은 우리의 아지트였다.


마음맞는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좋은'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이다. 게다가 내가 천천히 악기에 익숙해지는 긴 과정을 너그러운 인내심으로 지켜봐준 밴드 맴버들과 관객들을 가졌다는 건 또 얼마나 행운인지.

2009년 10월 28일 수요일

D-18

눈 깜박할 사이에 또 며칠이 흘러가버렸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보면 일상의 시간은 너무나 짧을 따름이다.

# 금요일 저녁 쓰바양과 홍대에서 만나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식사와 함께 소다와 맥주의 중간 단계인 일본 음료를 마셨고, 빈티지샵에서 잠시 옷구경을 하고, 빈티지 카페에서 "우리도 나중에 이런곳 하나 있었으면" 공상하며 칵테일과 올리브 절임을 나누어 먹고 헤어졌다.

# 토요일 오전 회사 동료 겸 친구들과 강남 버터핑거에서 접선. 가끔 이유없이 소집해도 아무말 없이 시간을 내어주는 고마운 녀석들과, 야단스럽게 40분 가량을 기다려 브런치를 먹었다. "Diner의 맛". 메이플 시럽과 허니 버터를 겹겹이 발라 팬케익 두장을 맛있게 먹어치웠다.

# 일요일 정오 혜림이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학교로 갔다. 선후배, 동기들 모두 함께 오랫만에 얼굴도 보고 혜림이의 결혼사진에도 출연했다. 부페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서인지 이상하게 피곤해졌고,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엉성하게 인사한후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버렸다.

# 오늘은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학교 선배를 만나서 장갑끼고 뜯어먹는 광화문 갈비를 맛보았다. 하드코어.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공연기획일 이야기도 듣고, 여행담과 사람들 안부도 주고받았다. 담배와 고기 굽는 연기가 자욱했는데 그리 나쁘진 않았다.

2009년 10월 23일 금요일

D-22

겨울에 한층 가까워진 차갑고 맑게 개인 아침을 맞이하며, 한여름의 외향성의 에너지보다는 겨울의 명상적인 분위기에 더 끌리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가벗고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는 적도의 나라로 떠나야하는데, 큰일이다.  

뉴 잉글랜드에서는 유난히 고요한 밤을 지나 창문을 열면 늘 이런 풍경이었다. 10월부터 4월까지 이어지는 긴 겨울은 혹독했지만 겨울잠자며 몽상하며, 편안하게 지냈던 기억뿐이다. 이제는 더 이상 현실이 아닌 추억이기 때문일까.

D-23

일찌감치 집에 돌아와 책을 정리했다.

책은 그냥 종이와는 달라서 도저히 분리수거함에 집어넣을 수가 없다. 유년시절부터 교육된 책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겠지만, 책을 버리는 건 왠지 우주적인 질서에 역행하는 듯한 그런 찜찜함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죄책감에 사서 읽지 않은 책들과,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된 분야 그리고 재미있게 읽었으나 소장할 이유까지는 없는 책들을 골라내는데 여러 시간이 걸렸다. 냉정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실제로 관심을 갖고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범위와 깊이의 책인지 또, 계속 보관하면서 두고두고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지 정확히 판단하는 데 자꾸 개입하는 의무감과 허영, 오지랖 같은 것들 때문이다. 계속 붙들고 있으려는 책들은 사실 결코 나의 일부가 되지 못한 책들이다.

고심끝에 걸러낸 책들을 신촌의 "숨어있는 책"으로 가져가 팔았다. 골초인데다 안색이 창백한 책벌레 스타일의 주인장 아저씨가 책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반겨주고, 내가 가져가는 책들을 보고 "오, 아주 마음에 드는 책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덕분에 선생님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은 어린이처럼 나는 조금 으쓱해지고, 또 많이 가벼워질 수 있다.

2009년 10월 21일 수요일

D-24

Now it's official. 오늘 싱가폴로 가는 편도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익숙한 환경과 생활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새로이 정착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지만 - 그리고 이번해엔 뭔가 변화가 있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지만 -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나니 왠지 싱숭생숭해졌다.

 

스물셋엔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서른살엔 무언가 얻는 것이 있으면 같은 무게로 잃는 것이 있고, "경험삼아"의 마음가짐만큼 미덥지 않은 것이 없다는 걸 안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호기심만큼 애착도 늘었다. 아끼는 물건, 좋아하는 공간, 소중한 사람들과 멀어져 잃게 될까바 벌써부터 마음 졸여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울에서의 3년동안 그닥 재미있게 지내지 못한 것 같다...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요가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

한동안 쉬면서 굳어진 근육들을 천천히, 아주 힘겹게 풀어가면서 나의 몸이 얼마나 고집스럽도록 신축성이 없는지, 팔 다리는 또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제 한몸 가누지 못해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걸 보면 조금 처량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요가의 모든 자세에서 호흡과 함께 관절과 근육을 조금씩 늘여가는 것이 관건인데, 이때 느껴지는 미세한 당김과 결림과 저림들이 몹시 고통스러워 차라리 treadmill에 몸을 던져 그런 감각들을 느낄 새도 없이 탈진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만두고픈 충동을 꾹 참아내고 다음 호흡에서 조금 더 깊고 큰 동작으로 이동하는 그 순간은 정말로 큰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최근에 깨달은 한가지는,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호흡을 멈추지 않은채로 집중하다보면 조금씩 유연해지고 강해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