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주 초에 있을 큰 발표의 내용을 구상하러 종로에 나갔다. 평소엔 집과 회사만 오가다보니 종로엔 격주로 걸음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변해있는 경관에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얼마전 피맛골에 얽힌 사람 사는 이야기를 취재한 TV 프로를 본 기억이 나는데, 한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이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를 물어보니, "이 건물 2층에 '뚜주르'라는 다방이 있었는데, 지인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와보니 없어져서 그렇다" 고 대답했다.
어떤 이들에겐 수십년간 익숙했던 생활 공간들을 아무렇게나 파괴해도 되는 것일까.
산책 중 목격한 또 하나의 사실은, 대로변을 마주한 세운상가 한 동이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미 파란 잔디까지 심어진 것을 보면 공사가 끝난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크게 침해받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최고급 전자 상가로서의 그 명성을 목격한 적도, 쇠락 이후에 도청/감청 장비나 포르노 비디오 같은 요상한 물건들을 구하기 위해 그곳을 드나든 적도 없지만, 세운상가는 나에게 최첨단에 대한 근대적 욕망을 증거하며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이 도시의 어떤 과거와 접속하고 싶을때, 세운상가는 그 창이 되어주었다.
게다가 거칠고 투박한 구조와 묘한 주상 복합의 형태가 요즘 건물들과 달리 낯설다 못해 신비로워서 이따금씩 길을 지날 때마다 눈으로 일별하곤 했던 것인데.
서울의 거리를 걸으면 낡고 의미있고 아름다운 것들이 급속도로 파괴되는 것이 너무나 자주 목격되어 절박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자본과 이윤과 시각적 합리성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몰라도, 그러한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많은 가치들이 너무나 가볍게 취급되는 듯 해서 몹시 슬퍼진다.
20090517 종로
비밀 댓글 입니다.
답글삭제아 비밀 댓글에 비밀 답글을 달 수 없는 것인가요? 이런.
답글삭제종로....가본지가 너무 오래된..
답글삭제님 덕분에 한번 가보고 싶네요..
언제부터 서울이 이리 넓어 졌는지...ㅠㅠ